지난 9월 15일 서울 조계사에서 한 권의 고서가 공개되었다. 성철 스님(1912-1993)이 남긴 책을 정리하던 백련암의 원택스님이 발견한 이 고서는 1548년 강화도 정수사에서 간행한 ≪십현담요해(十玄談要解)≫ 언해본이었다. 매월당 김시습(1435-1493)이 쓴 ≪십현담요해≫를 한글로 번역한 책인데, 지금까지 보고된 고서목록에 기록되어 있지 않은 유일본으로 추정되어 학계의 지대한 관심을 받았다.
‘십현담’은 당나라의 상찰 스님이 선(禪)의 핵심을 10가지 시구(詩句)로 정리한 책이고, 여기에 김시습이 주석을 단 것이 ≪십현담요해≫이다. 지금까지 이 책의 한문본은 더러 발견되었었지만, 언해본이 세상에 알려지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16세기에 드물게 한글로 번역된 선종계열의 불서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고, 또 한편으로는 조선시대 우리말 변천사를 연구하는 데에도 귀중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그동안 알려진 한글 고서에서 볼 수 없었던 어휘가 이 책에 많이 나오고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은 권말의 간기를 통해 1548년[嘉靖二十七年戊申] 강화도 마리산 정수사[江華地摩利山淨水寺]에서 간행된 것임을 밝히고 있다. 그리고 화주의 소임을 맡아 일을 추진한 분은 희조(熙祖) 스님이었음을 알려준다. 가로 24.9cm 세로 15cm, 44쪽 분량의 책이다.
1548년 정수사에서 간행한 김시습 <십현담요해(十玄談要解)> 언해본의 간기와 서문
표지 이 책의 서문에 성화(成化) 을미년에 설잠(雪岑)이 주석을 달았다고 쓰여 있다. 출가 후에 설잠이라는 이름을 썼던 김시습이 을미년 1475년에 썼으니, 그의 나이 41살 되던 해였다. 그리고 나서 73년이 지난 1548년에 한글로 번역된 이 책이 정수사에서 간행되었다. 아쉽게도 간행된 과정과 연유는 명확히 알 수 없다.
다만 김시습이 생전에 강화도 마니산에 왔던 사실이 있고, 그 때 지은 ‘강화 마니산에 올라[登摩尼山 江華]’라는 제목의 시가 전해온다. 그 시에 마니산 제단도 나오고 승사(僧舍)도 나오니, 참성단에 올라갔다가 정수사도 다녀갔음이 분명하다. “마니산 산색은 좋기도 하니(摩尼山色好) 바다 하늘 모퉁이에 우뚝이 솟아있다.(矗立海天隅) 날아가는 기러기도 건너지 못하고(飛雁不能渡) 맑은 아지랑이 모두가 그림 같구나.(晴嵐摠可圖) 제단에는 가을풀이 시들어가고(祭壇秋草老) 절집에는 흰 구름이 외롭다네.(僧舍白雲孤) 한번 보니 푸른 바다 넓기도 한데(一望滄溟闊) 물안개에 있는 듯 없는 듯 닿아있다.(煙波接有無)” (≪梅月堂詩集≫권4) 이 책이 나오기 4년 전인 1544년에 정수사에서는 법화경이 판각되었다. 그 경판 100여 장이 지금 전등사에 보관되어 있고, 그 인출본이 송광사에 전하고 있다. 조선 전기에 간행된 법화경의 수가 그리 많지 않으니 이 또한 귀중한 자료임에 틀림없다. 당시 정수사의 불서 간행이 자못 활발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정수사는 조선 초 함허기화(1376∼1433) 스님에 의해서 크게 중창되었다. 보물로 지정되어 있는 정수사 법당도 함허 스님이 중건했다고 전하며, 절 앞의 계곡 이름이 ‘함허동천(涵虛洞天)’일 정도로 그가 정수사에 미친 영향은 컸다. 그는 조선 초 숭유억불의 시대에 유불조화론을 주장했던 스님이다. <현정론>과 <유석질의론> 등의 저서를 통해서 편협된 당시의 불교관을 바로잡으려고 애를 썼다. 유교와 불교의 관련에서 정수사 법당 후불화는 주목할만 하다. 이 불화는 1878년 명미당 이건창(1852-1898) 가족의 시주로 그려 모셔졌기 때문이다. 조선말의 대학자이자 문장가요 고위 관료였던 이건창과 그의 부모, 자신의 부인, 두 동생 등 시주자의 이름을 화기에서 확인할 수 있다. 할아버지 이시원(1790-1866)이 이조판서를 지냈고, 이건창도 암행어사로 크게 활약했던 당대의 명문 사대부 가문임에도 불구하고 유교와 불교를 모두 포용하여 서로 배타적으로 생각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양명학을 기본 소양으로 삼았던 강화학파 학자들의 개방된 학문 풍토에서 가능한 일이었다. 우리 민족의 성산(聖山) 강화도 마니산에 자리한 정수사는 조선 초 유교와 불교의 조화를 주장했던 함허 스님이 중창한 곳이며, 김시습이 지은 ≪십현담요해≫의 한글번역본을 간행하여 불교 대중화에 앞장섰던 절이다. 그리고 절 아랫마을 판서댁 이건창 가족이 주위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소신껏 불화를 시주해 준, 열린 마음의 신도가 있었던 그런 유서 깊은 절이다. 1878년 이건창 가족의 시주로 그려진 정수사 법당 후불화 [사진 백련불교문화재단, 이숙희] ▲ 문화재청 주간소식지 <문화재발견> 제153호 2009-10-19 ▲ 필자 : 김형우 문화재청 문화재감정위원 ▲ 입력 : 2009-10-19 오후 05:11 원문수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