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강 정철(鄭澈 1536∼1593)이 말년에 강화도에서 살다가 강화도에서 죽은 사실은 <송강집>의 연보와 조선왕조실록 및 강화부지 등에서 확인됩니다. 여러 기록에 의하면 송강 정철은 1593년 12월 18일 강화도 송정촌(松亭村)에서 죽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곳이 ‘송정촌’이라 하였을 뿐 그 위치나 주변의 경관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찾아지지 않습니다. 송정촌은 지금의 강화군 송해면 솔정리(松亭 솔제이)일 것으로 짐작됩니다. 1696년 이형상의 <강도지> 우거(寓居)조에 ‘정철이 계사년(1593)에 관직에서 파직된 후에 송정(松亭)에 우거하다가 죽었다,’라 하였고, 1783년 김노진 <강화부지>의 유우(流寓) 정철조에는 ‘지금은 그 터를 상세히 알 수는 없다’고 했습니다.
석주 권필(權? 1569∼1612)은 24살 되던 1592년부터 강화도에 드나들기 시작하여 29살에 강화도에 정착하였으며, 죽기 2년인 42살까지 강화도를 거점으로 살았으니 성인이 되어서는 거의 강화도에서 산 셈입니다. 권필의 초당에 대해서는 1760년 여지도서 <강화부지>에 상세하게 전해옵니다. 오류천(五流川)에 초당을 짓고 위에서 아래로 네모나게 파서 연못을 만들었고, 제자를 가르치며 자연을 벗삼아 유유자적한 생활을 했다고 합니다. 그곳 송해면 하도리 오류내 무지락골에 소유동, 앵도파, 반환정 등의 이름을 지은 정원을 가꾸며 생활하였습니다. 그의 4대손 권적이 강화유수로 와서 1739년에 옛터에 세운 비석이 지금도 남아 있습니다. 석주 권필의 집은 송해면 상도리 홍해촌(紅海村)에 있었다고 합니다. 그의 아들 항(伉)이 사마시에 합격하자 홍해촌의 집에서 잔치를 베풀었다고 1783년 김노진 <강화부지>에 전해옵니다.
그는 송강 정철(鄭澈)의 문인으로 성격이 자유분방하고 구속받기 싫어하여 벼슬하지 않은 채 일생을 야인(野人)으로 보냈습니다. 월사 이정구(李廷龜)는 후원자 겸 지기(知己)였고, 강화유수로도 재임했던 동악 이안눌은 가장 가까운 친구였으며, 홍길동전의 저자 허균(許筠)과도 서로 잘 알고 지냈습니다. 병자호란 때의 충신 강흥업(姜興業)은 강화도에서 권필이 가르친 제자였으며, 어의(御醫)로 이름이 높았던 양예수(楊禮壽)와도 교분이 있었다고 합니다.
정민 교수(한양대 국문과)가 쓴 ‘권필 선생의 강화도 생활과 오류내 초당’이라는 글에 강화도 관련 내용이 상세하게 서술되어 있습니다. 이 글을 포함해서 몇몇 관련 자료를 첨부파일로 올려놓으니 내려 받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송강 정철(鄭澈 1536∼1593)이 말년에 강화도에서 살다가 강화도에서 죽은 사실은 <송강집>의 연보와 조선왕조실록 및 강화부지 등에서 확인됩니다. 여러 기록에 의하면 송강 정철은 1593년 12월 18일 강화도 송정촌(松亭村)에서 죽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곳이 ‘송정촌’이라 하였을 뿐 그 위치나 주변의 경관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찾아지지 않습니다. 송정촌은 지금의 강화군 송해면 솔정리(松亭 솔제이)일 것으로 짐작됩니다. 1696년 이형상의 <강도지> 우거(寓居)조에 ‘정철이 계사년(1593)에 관직에서 파직된 후에 송정(松亭)에 우거하다가 죽었다,’라 하였고, 1783년 김노진 <강화부지>의 유우(流寓) 정철조에는 ‘지금은 그 터를 상세히 알 수는 없다’고 했습니다.
석주 권필(權? 1569∼1612)은 24살 되던 1592년부터 강화도에 드나들기 시작하여 29살에 강화도에 정착하였으며, 죽기 2년인 42살까지 강화도를 거점으로 살았으니 성인이 되어서는 거의 강화도에서 산 셈입니다. 권필의 초당에 대해서는 1760년 여지도서 <강화부지>에 상세하게 전해옵니다. 오류천(五流川)에 초당을 짓고 위에서 아래로 네모나게 파서 연못을 만들었고, 제자를 가르치며 자연을 벗삼아 유유자적한 생활을 했다고 합니다. 그곳 송해면 하도리 오류내 무지락골에 소유동, 앵도파, 반환정 등의 이름을 지은 정원을 가꾸며 생활하였습니다. 그의 4대손 권적이 강화유수로 와서 1739년에 옛터에 세운 비석이 지금도 남아 있습니다. 석주 권필의 집은 송해면 상도리 홍해촌(紅海村)에 있었다고 합니다. 그의 아들 항(伉)이 사마시에 합격하자 홍해촌의 집에서 잔치를 베풀었다고 1783년 김노진 <강화부지>에 전해옵니다.
그는 송강 정철(鄭澈)의 문인으로 성격이 자유분방하고 구속받기 싫어하여 벼슬하지 않은 채 일생을 야인(野人)으로 보냈습니다. 월사 이정구(李廷龜)는 후원자 겸 지기(知己)였고, 강화유수로도 재임했던 동악 이안눌은 가장 가까운 친구였으며, 홍길동전의 저자 허균(許筠)과도 서로 잘 알고 지냈습니다. 병자호란 때의 충신 강흥업(姜興業)은 강화도에서 권필이 가르친 제자였으며, 어의(御醫)로 이름이 높았던 양예수(楊禮壽)와도 교분이 있었다고 합니다.
정민 교수(한양대 국문과)가 쓴 ‘권필 선생의 강화도 생활과 오류내 초당’이라는 글에 강화도 관련 내용이 상세하게 서술되어 있습니다. 이 글을 포함해서 몇몇 관련 자료를 첨부파일로 올려놓으니 내려 받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