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문헌자료
  2. 그림자료
  3. 지도
  4. 칼럼.보도문
  5. 역사교실

고려대장경을 둘러싼 쟁점들 [남권희]

조회 수 8837 추천 수 0 2010.06.16 00:48:24
해인사에 남아 있는 재조대장경은 흔히 ‘팔만대장경’이라고 불리며 그간 많은 연구가 이루어졌다. 또한 내년에 만든 지 천 년을 맞이하는 초조대장경 역시 선학들의 노력에 힘입어 베일이 하나씩 벗겨지고 있다. 하지만 고려대장경에 관한 쟁점은 여전히 많다.

첫째, 대장경의 판을 새긴 시기·규모·장소에 관한 것이다. 초조대장경의 경우 현종의 몽진 시기와 조성 발원 시기가 논란거리다. 국란(國亂) 속에서 민생이라는 시급한 문제를 제쳐둔 채 불력(佛力)으로 전쟁을 막고자 하는 발원은 기록 부족으로 인과관계를 구명하기 어렵다. 또한 판각한 장소와 규모도 알 수 없다. 보관 장소에 관해선 역사 기록과 현실성이 엇갈리는 부분이 있다. 고려교장(속장경)의 경우 10년 남짓한 시간에 수많은 자료를 정리해 판각까지 완료할 수 있었는지 의문이 제기된다. 대장경 간행을 주관한 곳이 개성에 있던 교장도감이었지만 금산사·해인사 등에서도 이루어졌을 가능성도 제기되고 있다. 재조대장경의 경우 강화도 대장도감에서 판각까지 이루어졌는지, 남해 분사대장도감의 역할은 무엇인지를 놓고도 논쟁이 벌어진다.

둘째, 대장경이 국가사업으로 추진됐지만 무신정권 중 하나인 최씨 집안(최충헌·최우·최항·최의)의 주도 아래 이루어졌다는 견해도 끊이지 않는다. 정부 차원에서 책임자를 임명하거나 물력 동원을 했다는 역사 기록이 없기 때문이다. 특히 책임을 맡은 인물로 거론되는 홍천 용씨의 용희수, 담양 국씨의 국영돈의 경우 일부 족보에서 대장경 성판도감(成版都監)에서 15년간 판각 감독을 맡았다고 돼있으나 관찬 사료에서는 발견할 수 없다.

셋째, 대장경이 옮겨진 경위와 시기에 대한 문제다. 초조대장경이 개성 남쪽의 흥왕사에서 부인사(대구)로, 재조대장경이 강화도 선원사에서 해인사(경남 합천)로 옮겨진 기록이 분명하지 않다. 이를 위해 동원된 물자·인력, 운반 과정에 대한 기록도 없다. 일부 학자는 아예 ‘경판이 새겨진 장소는 강화도가 아니라 해인사 자체이거나 인근의 절’이라는 주장을 펼친다. “팔만대장경의 경판 표면에서 먼 거리를 이동해 생길 수 있는 마모 흔적을 비롯한 그 어떤 흠도 찾을 수 없다(김상진 『나무에 새겨진 팔만대장경의 비밀』)”는 것이다.

넷째, 대장경 편찬을 총괄한 것으로 알려진 수기(守其)의 『교정별록(校正別錄)(30권)』은 단독 작업이라기보다 교정에 참여한 여러 사람의 결과로 보인다. 하지만 현존본의 수록 내용은 대장경 전체가 아니라 일부 경전에 대한 것으로 그 완전성과 일부 간행의 이유를 알 수 없다.

다섯째, 교장(속장경)의 경우 대각국사 의천(1055∼1101)의 편집 뒤 고려인에 의해 계속 교감이 이루어졌다. 중국 응현 목탑의 불복장(佛腹藏)에서 발견된 『화엄경수소연의초』의 경우, 일부는 요나라 판본을 번각(飜刻: 한 번 새긴 책판을 본보기로 삼아 그 내용을 다시 새김)한 것도 보이므로 초기에는 중국본을 그대로 번각하다가 점차 고려의 서체와 교정을 따른 것으로 보인다. 고려에서 초조·재조대장경이 만들어지기 전, 중국에선 북송칙판대장경(972~983년), 거란대장경(11세기)이 나왔다.

여섯째, 재조대장경의 중복본, 인본은 있으나 판목이 없는 자료의 성격을 놓고 이견이 많다. 최근 판목이 발견된 『내전수함음소』의 2판은 인출본이 일본 교토의 오타니(大谷)대학에 남아 있다. 여기에는 을사년에 대장도감에서 판각됐다는 간기(刊記)가 있다. 그러나 이는 대장경 목록이나 고종 때 대장경 2부를 인쇄한 해명장웅(海溟壯雄) 스님의 목록에도 없는 것이다. 대장경 편성 체제와 이동을 연구하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 말해주는 사례다. 결국 자료와 기록의 부족 현상이 계속되는 한 학자들의 연구 쟁점은 쉽게 해소되기 어려울 것 같다.

남권희 경북대 교수(문헌정보학과) | 중앙SUNDAY 제166호 | 20100516

 

16004606.jpg

Share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김창협의 어떤 편지 - 선비답게 살아가기

왕도정치의 꿈을 위한 선비의 자세 조선조 사대부들은 끊임없이 자신을 닦았다. 이를 수기修己라 한다. 그들은 이를 바탕으로 자신들이 배운 바를 정치 공간에서 실현시키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였다. 이를 치인治人이라 한다. 수...

  • 2012-01-25
  • 조회 수 120

연산군을 위한 제사

연산군을 위한 제사 김 문 식 (단국대 사학과 교수) 1506년 9월 2일, 연산군이 왕위에서 쫓겨났다. 이날 중종은 왕대비이자 모친인 정현왕후의 명령으로 왕위에 올랐고, 연산군은 강화도 교동으로 추방되었다. 중종반정이 일어났을 때...

  • 2011-11-25
  • 조회 수 1346

145년 만의 귀향, 조선왕실 의궤는 그날을 기억할까 [중앙일보] file

사색이 머무는 공간 <63> 강화도 외규장각(外奎章閣) 김형우 박사는 강화도를 역사체험학습장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역설한다. 신동연 기자 만천명월주인옹(萬川明月主人翁). ‘1만 개의 시냇물에 비친 밝은 달의 주인장’은 조선의...

  • 2011-06-05
  • 조회 수 4929

하곡학은 퇴계·율곡학과 함께 조선 3대 학파 [중앙일보] file

정제두 아호 딴 하곡학 연구원 초대 원장 맡은 정인재 교수 강화도서 9월 13일 개원, 무료 강독 한국 양명학(주자학을 비판하며 지행합일의 실천을 강조한 유학의 한 흐름)의 개창자로 알려진 하곡 정제두(1649∼1736). 그의 아...

  • 2010-09-10
  • 조회 수 10101

고려대장경을 둘러싼 쟁점들 [남권희] file

해인사에 남아 있는 재조대장경은 흔히 ‘팔만대장경’이라고 불리며 그간 많은 연구가 이루어졌다. 또한 내년에 만든 지 천 년을 맞이하는 초조대장경 역시 선학들의 노력에 힘입어 베일이 하나씩 벗겨지고 있다. 하지만 고려대장...

  • 2010-06-16
  • 조회 수 8837

정수사와 김시습의 ≪십현담요해≫ file

지난 9월 15일 서울 조계사에서 한 권의 고서가 공개되었다. 성철 스님(1912-1993)이 남긴 책을 정리하던 백련암의 원택스님이 발견한 이 고서는 1548년 강화도 정수사에서 간행한 ≪십현담요해(十玄談要解)≫ 언해본이었다. 매월당...

  • 2009-10-20
  • 조회 수 9275

선생님의 눈물 [심경호]

스승의 날이라는 5월 15일, 강화도를 사랑하는 여러 사람들과 함께 강화도를 돌아보았다. 서여 민영규 선생님은 77세 되시던 해에 나를 제자로 받아주시고 이 강화학파의 유적지들을 하나하나 알려주셨다. 초피봉과 옹일산이 바라보...

  • 2009-10-20
  • 조회 수 8212

100년 전 강화도 마을답사기 ≪심도기행沁都紀行≫ [문화재발견]

1906년 봄, 강화도에 살던 고재형(高在亨, 1846-1916)이라는 선비가 여행길을 떠났다. 돌아와서 ≪심도기행沁都紀行≫이라는 한권의 책을 썼는데, '심도'는 강화(江華)의 별칭이다. ‘심도기행’은 곧 ‘강화기행’이니 고향을 여행하고...

  • 2009-06-24
  • 조회 수 11550

‘강화 둘레길’ 만든다 [중앙일보]

[중앙일보 정기환] 1906년 봄 강화도의 한 선비가 행장을 차려 길을 떠났다. 과거에 급제했으나 나라를 잃자 호국의 발자취가 역력한 고향 강화섬 일주에 나선 것이다. 1년여에 걸쳐 400㎞를 걸어 100여 개 마을을 돌아보고...

  • 2009-06-17
  • 조회 수 9484

심도기행, 향토사랑의 기행시집 [기호일보] file

향토사랑의 기행(紀行)시집, 심도기행 김양수 (문학평론가) 2009년 04월 27일 (월) 14:45:27 기호일보 [옛날의 서문은 길가에 있는데/옹기 굽는 연기 올라 농장을 싸고 있네/평평하게 풀 우거진 넓다란 빈터가/당시의 훈련장이었음을 ...

  • 2009-04-30
  • 조회 수 83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