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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학파 이면백의 문집 <대연유고>

조회 수 189 추천 수 0 2010.06.05 16:34:46

대연 이면백(1767-1839)의 문집 <대연유고垈淵遺藁>

필사본, 2권2책, 10행 21자, 가로 20.5cm 세로 28.5cm. 서울대 규장각소장(古3428-420), 문집총간290.

 

 대연유고 표지.jpg

 

편찬 및 간행

저자는 鄭齊斗의 陽明學을 이어받은 椒園 李忠翊의 아들로, 부친의 학문을 아들 李是遠에게 전하였으며 증손 李建昌에게까지 전해지게 하여 江華學派의 형성에 일정한 역할을 하였다.

저자의 문집은 간행되지 않고 寫本만이 남아 있는데, 서문과 발문이 없어서 편찬 경위를 자세히 알 수 없다. 다만, 아들 이시원이 지은 〈先考?合葬墓誌〉에 “遺集 4권이 집에 보관되어 있다.”는 기록만 있을 뿐이다. 저자의 문집은 현재 1책의 국사편찬위원회본(D3B-96)과 2권 2책의 규장각본(古3428-420)이 남아 있다.

국편본은 첫 장이 落張되어 있으며, 祭文 4편, 序 5편, 傳 2편, 論 1편, 記 2편, 哀辭 1편, 墓誌 1편, 說 1편, 記事 1편 등 18편이 문체별로 정리되지 않고 뒤섞여 있다. 각 제목의 아래에 附箋紙가 붙어 있고 교감이 된 것으로 보아 문집을 간행하기 위하여 교정한 것으로 여겨진다. 국편본에는 규장각본에 실려 있지 않은 〈兪希安朴季淵傳〉 1편이 더 있으며, 낙장된 부분은 규장각본과 비교한 결과 〈碑誌說〉의 앞부분에 해당된다.

규장각본은 권1은 詩, 권2는 文이다. 권2에는 雜文 3편, 序 6편, 記 2편, 墓文 5편, 行狀 1편, 傳 1편, 祭文 6편, 哀辭 1편 등 25편이 국편본과는 달리 문체별로 정리되어 있다. 그리고 국편본에 비해 〈宛丘齋申先生六十一歲壽序〉, 〈行戶曹判書李公墓碣銘〉, 〈先考?合葬誌〉, 〈元基墓誌銘〉, 〈翊衛司衛率鄭君墓誌銘〉, 〈從祖父凡翁君行狀〉, 〈祭實齋申公文〉, 〈祭鄭叔當文〉 등 8편이 추가되어 있다. 국편본의 교정 사항이 반영되고 文 8편이 추가된 점으로 미루어 보아, 규장각본은 국편본을 바탕으로 轉寫한 것으로 보인다.

본서의 저본은 필사 연도를 알 수 없는 寫本으로 규장각장본이다.   필자 : 김기빈(金圻彬)

 

 

구성과 내용

본집은 2권 2책으로 되어 있다. 서문과 발문은 없고, 권수에 總目이 있으며 권마다 目錄이 있다. 권1은 詩, 권2는 文이다.

권1에는 詩 11제가 실려 있는데 대체로 연대순으로 수록되어 있다. 〈追和陶淵明處士飮酒二十首〉는 山中에서 생활이 무료하여 장난삼아 陶潛의 飮酒詩 20수에 화운한 것이다. 〈歸山作〉은 1801년 서울에서 돌아와 蜀莫에 우거하면서 울적한 심정을 푼 시로서, 제목이 없던 五言律詩 약간 편을 모아 ‘歸山作’이라고 명명한 것이다. 〈移江作〉은 20여 년 떠돌다가 1803년에 비로소 西江의 籠巖으로 집을 옮긴 뒤, 친척들과 소통이 되고 주변의 경관도 좋아 흡족한 심정을 읊은 시이다. 〈思古人二篇〉은 吉再와 李蓍晩에 대해 읊은 시로서, 길재에게는 벼슬에서 물러나 고향에서 생활할 때의 일에 대해서, 이시만에게는 자식에 대한 학문의 독려에 대해서 느낀 바가 있어서 지은 것이다. 〈蔘歌〉는 인삼의 뛰어난 효능, 재배 방법, 인삼에 대한 애정 등을 읊은 시이고, 〈歲甲戌之秋……〉 23수는 1814년 가을부터 서리가 일찍 와서 흉년이 드는 바람에 冬至부터 다음 해 봄까지 굶어 죽는 자가 속출한 참혹한 상황을 읊은 시이다. 이 밖에 尹永僖(畏心)의 시를 차운하여 지은 시, 洪原 郡守로 나가는 윤영희를 전송한 시 등이 있다. 〈山居一年藁〉 85수는 한 해 동안 지은 五言律詩를 모아 ‘산거일년고’라고 명명한 것이다. 〈靑石洞〉 이하는 1826년 아들 李是遠의 평안도 光化 任所로 출발하여 20여 일 머물다가 돌아올 때까지 지은 시들이 실려 있다. 그중에는 〈箕城雜詩〉 등 평양 인근의 명승지를 지나며 지은 시들이 많이 포함되어 있다.

권2에는 雜文 3편, 序 6편, 記 2편, 墓文 5편, 行狀 1편, 傳 1편, 祭文 6편, 哀辭 1편이 실려 있다. 잡문 가운데 〈碑誌說〉은 碑文과 誌文은 사실대로 기록하는 것이 옳은데 자손이 亡者를 위한다고 없는 사실로 美化시켜 묘도문을 지어달라고 청하는 것은 오히려 망자를 욕되게 한다는 내용이다. 서는 宛丘齋 申大羽, 玄同 鄭東愈의 환갑 때에 올린 壽序, 李禮在가 호조 낭관으로 있다가 鎭川 縣監으로 부임할 때 전송한 서문, 예전에 함께 道峯山을 유람했으나 이미 고인이 된 兪衡柱, 朴宗哲을 추억하고 그에 대한 행력을 기록한 〈道峯二客序〉이다. 기 가운데 〈谷耘記〉는 진사 權馥(穉蘭)이 시골에 내려와 농사짓겠다고 하면서 글을 청한 것에 대해 지은 것이다. 묘문은 韓呂의 모친 康氏에 대한 墓誌, 행 호조 판서 李勉兢의 墓碣銘, 先考 李忠翊 내외 合葬誌, 李勉始와 鄭東時의 墓誌銘이다. 행장은 종조부 李天翊에 대한 것이다. 傳은 〈桐山處士家傳〉이고, 제문은 장인 沈惠倫, 생원 鄭文永(伯康), 교리 任天常(玄道), 實齋 申絢, 亡友 鄭東時(淑當) 등에 대한 것이다. 애사는 亡友 姜國鎭(觀甫)에 대한 것으로 서문이 첨부되어 있다.   필자 : 김기빈(金圻彬)

 

해제

조선후기의 학자 李勉伯(1767~1830)의 문집. 이면백의 자는 伯奮, 호는 岱淵, 본관은 全州이다. 1801년(순조 1)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나 이후 과거에 응하지 않고 학문 연구에 전념하였다. 문집 외에 《墾署》?《海東惇史》 등의 저술이 전한다. 서문?발문이 없어 문집의 편찬시기나 편찬경위를 알 수 없다. 권1에 〈秋日漫吟〉?〈山寺晴後〉 등 시 113題를 수록하였다. 주변의 산수를 읊거나 〈讀東坡集書感〉과 같이 독후감에 해당하는 내용이 대부분으로, 특히 기존의 正史 野史에 대한 폭넓은 독서경험을 확인할 수 있다. 〈歎息〉 같은 작품처럼 자신의 곤궁한 처지를 서글퍼하는 시, 憂國의 뜻을 담은 시도 종종 보인다. 권2에는 〈碑誌說〉 등 雜文 3편, 〈道峯二客序〉 등 序 6편, 〈谷耘記〉 등 記 2편, 〈韓母康氏墓誌〉 등 墓文 5편, 〈從祖父凡翁君行狀〉의 行狀 1편, 〈桐山處士家傳〉의 傳 1편, 〈祭沈丈人文〉 등 祭文 6편, 〈姜觀甫哀辭〉의 哀辭 1편이 수록되어 있다. 이 중 〈碑誌說〉은 누구에게나 있을 법한 덕목을 들어 판에 박힌 글을 양산하는 당대의 풍조를 비판하며 대상 인물에게만 고유한 미덕을 찾아 실정에 맞는 글을 써야 함을 역설한 글이다. 역시 雜文에 포함되어 있는 〈記柳氏婢事〉는 교활한 사내종이 주인의 재산을 탈취하고자 1801년의 辛酉獄事를 빌미 삼아 주인집을 무고하나 평소에 어리석은 짓을 일삼던 여종이 의리를 지켜 주인 모자를 보호했다는 내용의 記事文이다. 智愚에 관한 論贊이 덧붙어 있다. (필자 : 정길수)

 

 

 

[家系]

李匡明

? 李忠翊(系)

    安東權氏(權益達의 女)

       ? 李勉伯

           靑松沈氏(沈惠倫의 女)

              ? 李是遠 判書

                   權球의 女

                   趙學逵의 女

                   沈?의 女

              ? 李止遠 郡守

                   尹儀鎭의 女

              ? 李喜遠 假監役

                   朴允榮의 女

              ?

                   南永周 郡守

 

 

[행적]

1767 [영조43 정해 乾隆32]    1세 6월 10일, 江華에서 태어나다.

  ~      ~       ~    ~    ~      ~  모친에게서 諺解로 「小學」, 「孟子」를 배우다.

1779 [정조 3 기해 乾隆44]   13세 부친 李忠翊이 解配되어 돌아오다.

1783 [정조 7 계묘 乾隆48]   17세 上京하여 從祖叔父 李天翊에게 程文을 배우다.

1797 [정조21 정사 嘉慶 2]   31세 10월, 장인 沈惠倫의 제문을 짓다.

1799 [정조23 기미 嘉慶 4]   33세 泮試에 장원하다.

1801 [순조 1 신유 嘉慶 6]    35세 增廣生員試와 增廣進士試에 합격하다. ○ 4월, 臨湍(長湍)의 살던 집이 불이 나서 蜀莫(開城)에 寓居하다.

                                             ○〈歸山作〉을 짓다.

1803 [순조 3 계해 嘉慶 8]     37세 부친을 모시고 西江으로 移居하다.

1804 [순조 4 갑자 嘉慶 9]     38세 가을, 水落山과 道峯山을 유람하고 金流瀑布와 玉流瀑布를 구경하다.

1805 [순조 5 을축 嘉慶10]    39세 1월, 생원 鄭文永의 제문을 짓다.

1806 [순조 6 병인 嘉慶11]    40세 부친을 모시고 강화로 돌아가다.

1814 [순조14 갑술 嘉慶19]    48세 〈歲甲戌之秋……〉 23首를 지어 흉년에 굶어 죽는 백성의 참상을 읊다.

1815 [순조15 을해 嘉慶20]    49세 아들 李是遠이 庭試文科에 장원급제하다. ○ 姜國鎭의 哀辭를 짓다.

1816 [순조16 병자 嘉慶21]    50세 2월, 모친상을 당하다. ○ 3월, 부친상을 당하다.

1826 [순조26 병술 道光 6]    60세 3월, 아들 李是遠의 평안도 光化 任所에서 20일가량 머물다가 돌아오다.

1828 [순조28 무자 道光 8]    62세 4월, 實齋 申絢과 亡友 鄭東時의 제문을 짓다.

1830 [순조30 경인 道光10]    64세 4월 15일, 졸하다. 江華의 乾坪에 장사 지내다.

 

[참고사항]

1) 2010년 5월 25일[29일] 이면백의 묘를 강화 양도면 건평리 665-27 이건창 묘역 좌측으로 이장했다. 

2) 대연유고는,  서울대 규장각 소장 2책본과  국사편찬위원회 소장 1책본(후손 이형주 기증) 외에, 부산박물관 소장본(2008년 7월 이덕성가 기증 전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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