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궁금한 점이 있어서 질문을 드려봅니다.
다름아니고 조선 숙종대에 강화의 요새화 작업이 대대적으로 진행되었다는 것을 조선왕조실록을
찾아보면 나오는대요...
그중 예를 들어 몇개만 보면...
숙종 3권, 1년(1675 을묘 / 청 강희(康熙) 14년) 4월 28일(병진) 3번째기사
영의정 허적이 강화도에서 돌아와 강화도의 형세에 대하여 보고를 올리다
숙종 7권, 4년(1678 무오 / 청 강희(康熙) 17년) 10월 23일(경인) 2번째기사
병조 판서 김석주 등이 강화도를 살피고 돌아와 지도와 서계를 올리다
숙종 23권, 17년(1691 신미 / 청 강희(康熙) 30년) 6월 23일(정축) 1번째기사
강화도의 축성에 어영청 군사를 보내 일하게 하다
영의정과 병조판서를 강화에 보내 살펴보게 하고.. 당시 도성방어의 핵심인 삼군문의 하나인 어영청
병사까지 빼내서 강화를 요새화하는 등.. 강화에 많은 신경을 쓰는것을 볼수가 있습니다.
그런대 의문점은......
숙종재위기는 대조선강경론자인 청태조 홍타이치도 죽은지 한참되었고.... 그리고 섭정왕 도르곤도 죽은 후이고
대조선압박기는 아닌대... 게다가 대륙은 삼번의난으로 인해 온신경이 남쪽에 집중되어 있는 시기라 조선을
정벌할 때도 아닌대.. 효종때도 아닌...숙종대에....
이 시기에 강화를 요새화하는대 많은 노력을 기울였는지 이해가 가질않아서 질문을 드려봅니다..
조선 후기 강화도의 수비체제가 강화되기 시작한 것은 병자호란을 겪었던 인조와 효종대부터였습니다. 효종은 특히 북벌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강화도의 수비체제 강화를 위해 주변의 진보들을 강화도를 중심으로 재편하는 등 많은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이후 숙종과 영조·정조대 까지 강화도의 수비체제는 지속적으로 강화되었습니다.
17세기는 전란의 후유증과 소빙기의 이상 기후를 극복하는 시기였습니다. 17세말에 즉위한 숙종은 재위 초반에 사회경제적으로 어려운 상황에 있었습니다. 도성 주변의 경기와 해서 연안 지역에 출몰하는 황당선(荒唐船)과 중국측의 해적 소식은 도성수비론(都城守備論)이 본격적으로 거론되는 배경이 되었습니다. 숙종은 도성 수비를 위해 북한산성을 축조하는 등의 노력을 기울였지만 근본적으로는 도성수비에 자신감을 갖지 못하였습니다. 이런 이유로 그는 강화도에 성곽을 쌓고 군비를 준비하면서 도성의 ‘보장처’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고, 강화도의 수비체제 강화를 위해 많은 관방시설을 하였습니다. 강화도 전 해안에 돈대를 축조한 것을 비롯하여 문수산성의 축조, 그리고 강화부성의 축조에 이르기까지 그는 축성을 통해 강화도의 수비체제를 강화하려는 계획을 추진하였습니다.
이후 영조와 정조대에는 수군(水軍)을 강화시키고 강화도의 경제적 자립을 위한 정책도 아울러 시행됩니다.
이 주제와 관련하여서는 다음의 논문이 참고됩니다.
李敏雄, 1995 ?18세기 江華島 수비체제의 强化? <韓國史論>34 서울대 국사학과
朴廣成, 1973 ?丙子亂 後의 江華島 防備構築? <畿甸文化硏究>3 인천교대 기전문화연구소
송양섭, 2002 ?17세기 강화도 방어체제의 확립과 진무영의 창설? <한국사학보>13
이홍두, 2008, ?병자호란 전후 江都의 진보설치와 관방체제의 확립? <인천학연구>9